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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여성임신

ㆍ원고제공 : 판암사회복지관 정효선
사례 1(경수손상여성장애인)
나의 고향은 대전입니다. 아버지는 그곳 탄광에서 일을 하셨고 중학교 때 춘천으로 진학하여 키가 커서 배구부에 들어가 기숙사 생활을 하였습니다. 고등학교는 배구특기생으로 서울 한양여고에 진학하였습니다. 대학졸업 후 수영강사로 근무하다가 수영장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목이 바닥에 부딪친 것입니다. 병원에 실려 가면서 목만 다쳤거니 생각했지만, 정밀검사 뒤 경추가 부러져 목 이하를 쓸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10년 가까이 운동을 해온 나로서는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말이 꼭 사형선고 같았고, 병원의 진단을 믿지 않았습니다. “난 원래 남들보다 운동신경이 좋기 때문에 금방 나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버텼습니다. 몇 달 동안 물리치료를 계속하였지만 몸은 역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집안 형편도 어려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몸이 이렇게 다친 걸 어떡하겠습니까? 그러다가 새로운 희망의 빛이 보였습니다.

제가 재균이 아빠를 만난 곳은 1998년 5월 사고가 난 뒤 입원치료를 받던 00병원. 남편은 같은 병원에 입원중인 부친(지금은 시아버님)을 간병하러 자주 병원을 드나들다가 저와 만났고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임신이 가능하다는 희망

우리 부부는 무수한 반대를 무릅쓴 결혼이었다는 점 때문에 다른 부부들 못지않게 결혼생활을 잘 꾸려가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결혼을 우려한 분들에게 보답하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켜 여느 아이 못지않게 훌륭하게 키워내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 부부의 사랑의 완성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부부생활과 임신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정효선 국립재활원 성재활 상담실장을 찾아갔습니다. 상담실을 나오면서 우리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 것만으로도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릅니다.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수개월간의 노력 끝에 2003년 3월 임신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제 우리도 아빠, 엄마가 된다는 생각에 남편과 나는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그때부터 “임신 중에는 좋은 것만 먹고 듣고 보아라”는 어른들 말씀을 되새기며 한순간 한순간 아이의 건강한 탄생을 위해 남들보다 열배, 스무 배 더 조심스런 임신기간을 보냈습니다. 남편이 귀가 길에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과 과일을 한 손 가득 들고 들어 올 때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릅니다. 태교음악 CD도 사서 들려주고, 스스로 만지고 느낄 수 없는 나를 대신하여 불룩해진 내 배를 만지며 아기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느끼면서 남편은 매우 좋아했습니다.

먹어온 약물로 인한 고민

장애인의 임신이 그렇게 만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시로 일어나는 경련 때문에 복용해온 다량의 약을 임신 중에는 끊어야 했습니다. 또 임신에 따른 복부압과 방광염 등은 엄청난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약을 포기하고 임신 전보다 한 층 어려워진 방식으로 대소변을 해결하면서 임신 기간을 견뎌 내기로 작정했습니다. 임신 초기에 어지럼증이 더 심해져 휠체어에 앉아 있기도 힘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식탁에 엎드려 있는 경우가 많았고, 소화도 잘 되지 않아서 힘들었습니다.

임신초기 풍진 양성반응과 양수검사를 하라는 의사의 권유

임신 2개월쯤 되었을 때 고열이 발생하고 어지러움을 동반한 감기 증세로 동네 병원을 찾았더니 진찰 결과 풍진 양성반응이 나타났으니 정밀 검사를 통해 태아 감염여부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우리 부부의 계획이 무모하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스쳐지나갔습니다. 다행이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한 결과 임신 초기 산모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세이고 별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병원에서 나의 몸이 비장애인보다 불편하기 때문에 아이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싶으면 양수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부부는 한동안 고심하였지만 양수검사 때문에 혹시라도 유산이 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결국 검사를 받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아이가 혹시 건강하지 않더라도 꼭 낳아 상태가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잘 키워내겠노라고 결심하였습니다.

중기부터 시작된 임신성 당뇨와 대소변

임신 중기에는 임신성 당뇨증세가 생겨 매우 좋아하는 아이스크림마저 먹지 못하게 하면서 더운 여름을 보냈습니다. 평소에도 용변을 보기가 쉽지 않았으나 배가 불러오면서 더욱 어려웠습니다. 전에는 남편이 저의 배를 손으로 눌러 내리는 방식으로 대변을 처리했으나 아이 때문에 마음대로 배를 누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적게는 3~4일, 길게는 일주일까지 용변을 참는 것으로 횟수를 줄였습니다. 배가 불러오면서 호흡곤란 현상도 잦아졌습니다.

후기로 들어서면서 출산종류(수술여부)

임신 말기가 되면서 대소변 문제가 심각해지고 점점 불러오는 배로 인해 혈압은 올라가고 숨은 가빠져서 병원에서는 출산예정일보다 3주 앞당겨 제왕절개를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제가 태동을 느끼지 못하는 관계로 병원에서 하루에 검사를 5번씩 했고 임신성 당뇨 때문에 음식은 더욱 조심해야 했습니다.
수술일자가 정해지자 수술에 따르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났습니다. 마취과 의사는 전신마취가 위험 할 수 있다며 해외논문과 자료를 검토한 끝에 부분마취로 수술하기로 했으며 재활치료를 해온 담당의사는 분만 과정에서 아이보다 산모가 위험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부부의 사랑을 위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미래를 위하여 남편에게 “자신 있어, 잘 낳을게” 라는 말을 남기고 수술실로 들어갔습니다.

출산

2003년 11월 10일. 그렇게 하여 재균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수술실 밖에서 기도하고 있던 남편과 엄마는 너무나 길었던 시간이었고 너무나 초조했었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나중에 재균이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고통스런 10개월이었지만 내 몸에서 갓 빠져나온 아기를 보는 순간 말 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우리 재균이 잘 키우자, 잘 키우자’는 생각으로 가득하였습니다. 중환자실에서 하루 정도 머물고 일반병실로 올라와 일주일 후 아이와 함께 퇴원하였습니다. 나중에 전해 듣기를 병원에서는 구내게시판에 1급 장애인이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며 여러 사람에게 용기를 주었다는 글을 게시했다고 합니다.

모유수유와 육아 도우미

재균이가 태어나자 모유수유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내가 복용하고 있는 약이 혹시라도 아기에 대한 영향 때문에 모유 수유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와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부족하였습니다. 엄마의 도움으로 그런대로 꾸러나가고 있지만 늘 미안하고 엄마에게 너무나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입니다.
우리 부부는 이제 6살이 된 재균이가 크면 보여줄 생각으로 임신 당시의 초음파 사진부터 어릴 때 모습까지 수많은 사진을 정리하는 데 푹 빠져 있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갖은 어려움 속에 탄생시킨 만큼 우리 재균이는 자신의 존재나 생명에 대한 경의가 남다를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우리 부부가 잘 사는지 어떤지 자주 접촉하지 않는 지인들은 궁금해 합니다. 우리는 아주 행복한 정도로 잘 살고 있습니다. 부부싸움이라곤 쇼핑 다니다 사야할 물건 때문에 가벼운 말다툼을 벌이는 것이 고작입니다. 남편은 나를 만날 때부터 이해해주고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 남편이 늘 고맙고 그래서 싸울 일은 없습니다. 소변은 호스로 빼내고, 대변도 정기적으로 관장을 해줘야 하지만 재균이 아빠는 한번도 귀찮아 한 적이 없습니다. 결혼 직후부터 함께 살고 있는 내 어머니를 친 어머니 다름없이 모시고 있습니다.

남편은 서초동에 있는 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회식을 제외하고는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경우는 1년에 손가락 꼽을 정도입니다. 제가 바깥세상 구경을 좋아해서 남편과 자주 외출을 합니다.
장애인 가까이 오랜 시간 대해본 남편은 “몸이 불편 할 뿐 똑같은 사람이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정의 깊이가 더 깊고 세상에 대해서도 더 긍정적으로 생각 한다”고 격려해 줍니다.
잠을 잘 때 자주 몸을 움직여줘야 하고, 경련도 자주 일어나고 스스로 물 한 컵 마실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수시로 남편을 깨우지만 남편은 언제고 금방 일어난 듯이 일어나 군소리 한번 없이 잘 챙겨줍니다. “제가 장애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남편을 만나거나 지금처럼 서로를 위해 주는 부부 사이가 됐을까?” 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나의 소중한 남편과 재균이로 인해 몸은 불편하지만 지금 아주 행복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부족한 저의 글을 읽어주시고 감사하구요. 모두들 힘내세요.
사례2(뇌성마비 여성장애인)
사람의 성격은 유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겪은 주변 환경이나 사람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한다. 여성 장애인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여성 장애인에게는 '여성'과 '장애인'이라는 고정 관념의 속박이 주어진다. 22세에 남편을 만나기전까지 나의 삶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그냥 장애인의 삶이었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성정체성이 없는 그냥 장애인으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살았다.

친정아버지는 대부분의 장애아 부모님들과 다르게 뇌성 마비인 데다가 늦둥이이기도 한 딸을 많이 아껴 주셨기에 장애로서 차별이나 서러움을 받지 않고 오히려 공주처럼 예쁘고 귀하게 자랐다. 우리 집에서는 엄마가 직장에 다니시는 관계로 용변과 목욕은 아버지가 담당하셨다.
초등학교 5, 6학년이 되면서 어릴 때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부문에 대에서 의문과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남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옷을 갈아입히시거나 용변을 볼 때가 많았는데 다른 여자애들은 장난으로 치마를 들춰도 어른들이 야단치고 난리가 나는데 왜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시는 것일까?
그런 이유로 물리적으로는 여성이라고 해도 마음으로 여성이라고 성 정체성을 인식 할 수는 없었다. 몸도 불편한데 여성으로서 뭘 할 수 있겠냐는 생각을 하게 됐고 진정한 여성으로서 정체성이 있기보다 생리적인 여자라고 인식할 뿐이었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자 장애가 심했기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실 경우에 신변처리와 거취가 걱정이 되었고 가정 내에서 곱게 자란 내가 시설에 들어가서 적응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이 문제로 한참을 고민한 후에 내가 살길은 나보다 건강한 사람을 만나서 결혼을 하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이성에 눈을 뜨게 되고 장애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면서 장애인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으로, 한 여성으로 살고 싶었다.

이때부터 연애를 하기 위해서 관련 책도 읽고 실제 연인들 데이트를 할 때 같이 다니면서 데이트 방법을 배우는 등 이론과 실제 공부와 노력을 시작했고 드디어 22세에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남편 전에 잠깐 만났던 남자친구들은 나에게 그다지 강하게 스킨십을 요구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아마 자신이 장애여성을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길까봐 조심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남편을 만났을 때 난 조심성이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행동한건 아니었지만 남편은 물론 지금까지 누구도 나를 여자로 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킨십이나 애정 공세에도 떨림이나 거부감이 없었다. 그저 사랑에 대해 막연한 소녀적인이 감상만이 있을 뿐이었다. 생리, 자위, 포르노... 사춘기에 겪고 지나갔을 기본 성적 호기심마저 없었고 처음에는 남편을 거절하게 되면 나를 떠나 버릴 것 같아서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그때까지도 나에게 성과 섹스는 개념 속에 마지못해 하는 행위 외에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만남이 거듭되면서 남편은 나를 여자로 대하고 있음을 느끼고 육체적으로 여성적인 매력도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결혼 생활 5~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가정생활 속에서 장애 여성의 위치가 어때야 바람직한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결혼 초기에는 남편과 많이 다퉜다. 다른 부부들도 신혼 초에 싸움이 잦게 마련이지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벽 때문에 다툼이 한층 더 심각해지곤 했다. 책을 책꽂이에 꽂는 단순한 일도 난 높은 곳에 놓으면 꺼낼 수 없으니 낮게 놓아달라고 하고 남편은 본인의 습관대로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놓아서 한바탕 싸우기도 했다. 싸움의 내용이야 어찌됐건 먼저 사과해야 용변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의.식.주를 해결하고자 터득한 나만의 방법이랄까...

밥을 먹기 위해 비굴해져야 하는 것은 직장이나 가정이나 마찬가지인 듯싶었고 부부가 생활 할 때 서로 끈끈한 애정이 밑바탕 되어야 하겠지만 때론 필요에 의해 서로 가진 능력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이 나보다 육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것이 사실이니 긍정적인 방향으로 맞춰 가면 건강한 부부들보다 훨씬 만족스럽고 행복한 질 높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하고 몸에 장애가 있어서 힘들다고 절실히 느꼈던 때는 임신과 출산 과정이었다. 몸도 불편하고, 정신적 안정도 찾지 못한 채 뱃속의 아이가 6개월이 지나면서 숨이 가빠왔다. 그때는 아이의 건강에 대한 걱정이나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기보다 내 상황에 대한 회의로 가득 차 있었다.

임신 7개월이 넘어서자 옆이나 돌아누울 수도 없이 숨이 차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급히 병원에 입원했지만 내 장애에 맞는 시설도 갖춰져 있지 않거니와 침대가 몸에 맞지 않아서 삐걱삐걱 소리가 요란하게 나니까 같이 입원한 산모들이 항의하고 하루, 한순간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렇게 5월, 임신 8개월이 되자 날은 점점 더워지고 음식도 물 한 모금도 넘기기 어려워지면서 어서 아이가 뱃속에서 나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담당 주치의는 열흘 정도 더 뱃속에서 아이를 키워서 안전하게 낳자고 했지만 그때 나에게는 한가한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의사에게 도저히 못 견디겠고 더 이상 1분이라도 더 있으면 죽을 것 같다고 협박(?)했고 의사도 그 정도라면 산모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바로 걸친 수술로 들어갔다. 그리고 1시간 후 남자아이를 낳았다. 마취에서 깨어나자 제일 먼저 내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뱃속이 시원했다.
회복실을 나와서 남편과 가족들의 얼굴을 보고 행복한 순간도 잠시, 의사에게서 아이가 엄마와 같은 뇌성마비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전도 아닌데 그럴 수가 있을까? 처음에는 믿기지도, 믿을 수도 없었다. 처음 2~3달은 ‘아이가 크면서 건강해지겠지’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크게 걱정하지 않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발달이 늦어지기 시작하면서 아이의 장애가 현실로 다가왔다.
엄마와 똑같은 장애. 그때 슬픔과 비참한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누구를 원망해 보고도 싶었고, ‘왜 이 몸에 아이를 낳았을까’라는 후회도 들었다. 그리고 장애인으로서 겪었던 서러움을 내 아이도 똑같이 겪을 생각을 하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1.8kg 미숙아로 태어나 산소 호흡기를 꽂고 가쁜 숨을 쉬고 있는 아이를 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에 남겨두고 일주일 후에 퇴원을 하고 그렇게 한달이 지났다. 아이가 백일이 될 때까지 남편은 직장을 쉬었고 나도 친정에서 몸조리를 해서 별 걱정이 없었지만 남편은 직장을 다시 나가야 했고 친정어머니도 지병이 있으셔서 가족들이 계속해서 나와 아이를 돌봐주기 어려웠다.
장애를 가진 엄마가 아이를 키우는데 도움을 줄만한 복지제도가 갖춰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 혼자 건강한 아이도 아닌 백일이 지나도록 목도 못 가누는 아이와 하루하루를 보내려니 눈앞이 아득했다. 그러나 마냥 환경을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당장 옆에 사람이 없으면 아이와 굶고 있어야 하는데, 내가 마음을 굳게 먹고 살아갈 방법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뼈저리게 후회스러웠던 것은 남편을 만난 것도, 어린나이에 하루를 살아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되물림 된 장애아를 낳은 것도 아니었다. 스무 살이 넘도록 장애인이라는 틀 안에서 스스로 갖혀 사회 경험이 적어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몰랐다는 것이었다. 이미 어엿한 성인이 되었고 한 사람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로써 강해져야 살아갈 수 있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동안 ‘어려운 문제들을 남편이나 가족, 누군가가 나서서 해결해 주겠지’라는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장애인이라는 어리광과 엄마와 아내로써의 책임감 사이에 명확하게 자리매김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 세 식구의 임시 거처였던 경기도 구리 집에서 서울로 남편이 일하러 가고 나면 친구들이 돌아가며 아이를 돌봐주러 왔다. 임시방편으로 아이와 용변, 식사는 해결되었지만 마음속에는 늘 ‘이러다 친구들이 안 오면 어쩌나. 남편이 다른 데로 도망 가버리기라도 한건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노심초사하며 지냈다. 가끔 친구들이 1시간이라도 늦거나 하는 날이면 아이는 똥을 온 방 바닥에 묻히며 울고,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같이 울고 있는 날도 많았다. ‘아이는 무슨 잘못으로 우유조차 먹일 수 없는 엄마에게서 태어나 이렇게 고생을 하는 것일까? 장애가 있는데 아이를 낳은 것이 잘못일까?’ 아니, 그때나 지금이나 장애 자체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장애를 핑계로 인생을 책임지는 성인으로, 엄마로써의 준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6개월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장애아와 장애엄마가 살아내기 전쟁은 점점 적응이 되었고, ‘행복’이나 ‘불행’의 개념을 잃어버린 채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빴다. 출생부터 장애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어쩌면 장애에 대해 세상에서 부딪치는 감성이 오히려 무감각해지지 않았을까.

경기도 구리 단칸방에서 여름을 나고 가을로 접어드니 아이와 겨울나기가 걱정되었다. 한평 남짓한 방, 화장실도 밖으로 돌아나가야 하는 곳에서 겨울을 지내려니 막막했다. 고민하고 또 걱정해 봐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동안 도와주러 오던 친구들과 교회 사람들에게 하소연하다 마침 우리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진행하시는 기독교 TV 성금모금 프로에 출연해 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성금모금이라는 것이 자존심(곧 죽어도) 상하는 면이 있었으나 그런 것을 가릴 처지가 아니라서 출연을 결심했다. (이것이 우리 가족의 방송생활 시작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 가족은 매우 특이해 방송의 소재로 적합했는지(물론 목사님이 신경 써 주시기도 했겠지만) 방송국에서 금방 촬영하러 왔다. 집안 사정을 촬영하는데 불쌍해 보여야 성금이 많이 모이겠지만 최대한 추하거나 궁색해 보이지 않기 위해 옷을 깔끔하게 입고 밝게 웃으며 촬영에 들어갔다. 하지만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비장애 남편이 얼마만큼 희생하고 사는지에 모든 초점이 맞춰졌다. 나와 아이는 마냥 응석만 부리는 남편의 짐 같은 존재로 대상화 되어있었다. 뭔지 모를 거부감이 들었지만 시나리오대로 따라 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의 초라했던 단칸방의 신혼살림 촬영을 마치고 일주일 뒤 본격적으로 성금이 모아지는 스튜디오 녹화를 하러 방송국에 갔다.
스튜디오 녹화 역시 힘겨운 삶을 보여주고 눈물샘을 자극해야 하기 때문에 역시 모든 초점이 남편에게 맞춰졌다. 남편이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장애여성을 뒷바라지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인터뷰가 이어졌다. 물론, 남편이 착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지 장애인과 사는 것 때문에 착하다고 영웅시 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단순화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곧 죽어도 뭐라고 했던가. 여성장애인으로써 자존심과 존재감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늘 잠재되어 있었나보다. 진행자의 질문 중에 “남편에게 제일 미안할 때가 언제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솔직하게 말해서 내 장애 때문에 미안한 적은 없다”라고 말해 스튜디오의 모든 스탭을 긴장시켰다.
그 후 교회 사모님에게 “거기가 장애 운동하는 곳이냐” 며 혼났지만 돈이나 이미지보다 나와 가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다. 다행히 성금이 꽤 모아져서 한 달 후에 경기도 단칸방 생활을 끝내고 서울 도봉구 반지하 셋방으로 이사했다.
전세집이지만 겨울을 나기에 걱정 없고, 아이를 낮에는 복지관 내에 장애 전문 어린이 집에 맡기고 밤에는 도우미에게 맡기게 되면서 우리는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첫째 아이를 키우기 위한 전쟁은 계속되었다. 비장애 아이들이 인지능력을 위한 교육과 문화적 혜택의 교육을 누리는 동안 우리 아이는 살기위한 몸부림을 해야만 했다. 뇌파검사, 경기를 하지 않도록 하는 각종 약물 등 뇌성마비 아이는 예민하고 경직이 심해서 밤에 잠을 잘 못 잔다. 그래서 갖가지 방법으로 재우기 위해 노력하다가 같이 부둥켜안고 운 날이 많다.

1년쯤 후에 다시 둘째를 갖게 되고 둘째만은 건강하고 안정되게 낳기를 바라며 우리나라 최고의 시설이 갖춰진 병원에 다니면서 정기검진도 빠뜨리지 않고 다녔다. 그렇게 열달이 지나 건강한 여자아이를 낳았고 둘째 아이 임신 중에 우리 가족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남편을 만난 모임에서 그 당시 한창 우리나라 성문화를 수면 위로 끌어 올렸던 구성애씨와 장애인 성 인식개선 프로그램을 추진했던 인연으로 복지신문 등에 우리가 자주 소개되었고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둘째아이 출산과정과 일상생활을 촬영하여 방영하였다.
장애유형별로 몸이 불편한 엄마들을 중심으로 아이를 키우는데 힘든 점과 모성권을 찾아가고 지켜내는 모습들을 담았다. 방송을 보기 전까지 나만 장애를 가진 주부이자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장애여성들도 다양한 형태로 엄마의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느끼며 색다른 자극을 받았다.

비장애인과 결혼하여 위축된 모습으로 살고, 같은 장애인과 살아도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기가 죽어서 자기 목소리를 못내는 여성들이 나로 하여금 장애여성과 사회복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생각해보게 했다.
방송 후 바로 다음 날부터 밖에 나가니 사람들이 얼굴을 알아보기 시작해서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방송의 위력을 실감했다. 솔직히 그동안 남편만 영웅시 되고, 나는 그냥 장애인으로만 취급(?) 받아오다가 나를 나 자체로 인식하고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에 작은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방송의 여파로 잠시 들뜬 마음 상태로 지낸지 6개월 정도가 지난 뒤에...

2001년 가을. 첫째 아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엄마가 힘들어 한 것이 안타까워서이였을까?
아니면 자기가 장애인으로써 살아가야 할 삶이 힘겨워서 이였을까. 남의 손에 맡겨져서 고생만 하던 첫째 아이가 허무하게, 너무도 무심하게 세상과 이별했다.
남의 손에서 떠났기에 의심스러워서 시신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도 해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엄마 손에 밥 한번 먹여보지 못하고 떠나보낸 첫째아이. 그때 사회적으로 인식이나 복지 혜택만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어도 아이를 그렇게까지 고생시키지 않았을 텐데, 지금 와서 후회한들 무엇 하랴. 하지만 운명이라고 넘기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아이 장례식장에서 ‘장애 아이는 일찍 죽은 것이 오히려 여러 사람 고생 안 시키고 다행 이다’라고 이야기 하는걸 듣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장애를 가졌으면 삶의 중요성도 없다는 말인가. 몸이 건강하든 건강치 못하든 생명은 그 자체로서 충분히 존중 받아야 함이 마땅한데 장애인은 존재감도 없다는 건가. 첫째아이가 하늘에서 돌보는지, 둘째는 잘 크고 있다. 그때 구성애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늦게나마 결혼식도 성대하게 세종문화회관에서 올렸고「KBS 인간극장」에 출연하여 인기(?)도 많이 얻었다. 소외계층의 삶의 질 향상과 좀 더 낳은 세상을 위해, 현재 [장애인 푸른 아우성]의 대표로서 장애인들의 성 정체성과 인권에 힘써 노력하고 싶다.

저는 학교 다닐 때부터 리더 기질도 있어서 다행히 교육 효과가 잘 먹혀들었습니다. 당당하게 제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프러포즈했습니다. 성질 급한 우리는 결혼도 하기 전에 동거를 했고, 그리고 저는 여성으로 아이를 낳았습니다.
물론 장애가 있는 저에게 그런 일련의 과정이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상인보다 몇 배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저는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행복은 내가 노력하는 만큼 얻는 거라고.
행복은 적극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누릴 권리가 있는 거라고. 물론 저의 경우는 흔한 경우가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오죽하면 이런 희안한 일이! 하면서 「인간극장」까지 소개됐겠습니까. 사실 제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정상적인 남녀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다면 결코 텔레비전에 나올 일이 없었겠지요. 제가 장애인이니까 비장애인과 결혼한 것이 화제성이 있어서 방송을 타게 된 것이니까요. 전 사람들에게 화제 거리의 제물이 될 생각이 전혀 없거든요.
저는 제 나름대로 사생활을 보고 받아야 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방송을 타게 되면 어떻게든 제 사생활은 침해받게 되어 있습니다. 제 남편도 마찬가지구요. 그리고 자칫 많은 장애인들에게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장애인 여러분도 저처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장애인의 푸른 아우성’을 운영하면서 미팅정모도 가져보고, 또 상담에도 응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많은 장애인들이 성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지나치게 위축되어 있고, 또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더군요. 상담게시판을 보면 정말 느껴지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라고나 할까요. 예를 들어 비장애인 남성이 장애인 여성과 하룻밤을 보낸 뒤 사랑하지 않는데도 나쁜 짓을 했다고 고백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남녀가 만나서 서로 원하면 하룻밤 보낼 수도 있는데도 상대가 장애인이라고 생각하다보니 죄책감을 느낍니다.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성적으로 동등하게 여겨야 하는데, 장애인은 미성년자처럼 보호해야 할 특별한 대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섹스는 개인이 누려야 하는 선택의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완성이 꼭 결혼으로 귀결될 필요는 없거든요. 얼마 전에 정선희 씨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개그맨 이영자가 출연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사랑은 이뤄졌는데, 결혼을 할지는 모르겠다"는 것이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결혼이 사랑의 완성도 아니고, 사랑의 종착지가 결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에 대해 보수적인 장애인이나 장애자녀를 둔 부모들은 지나치게 성과 결혼을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있어요. 요즘 신세대들은 살아보고 마음에 들면 결혼하는 시대인데, 장애인들도 이런 시대적인 분위기를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애인은 결코 무성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누구나 자신이 꿈꾸는 성적 환타지를 현실에서 실현시킬 노력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표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무엇보다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할 줄 알면서도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정서, 느낌에도 관심을 가지고 관찰해 보세요.
진정한 대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서로 정신과 정신이,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대화를 해야 매력을 느끼고 사랑을 느낀다고 믿습니다. 물론 그런 인간적인 것보다 조건을 먼저 따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은 서로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나눌 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